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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페이지 내용 : 헤더 로즈 저 | 한겨레출판 펴냄 | 2020 예술가와 마주 앉는 순간 현대적 사랑의 박물관 소설을 쓸 때 다른 예술 장르의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다. 음악의 힘을 제일 많이 빌리고, 가끔 그림을 찾아보며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많은 예술가가 다른 창작품에서 영감을 받고 모티프를 얻어 자신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나간다. 실제로는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예술가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창작 활동을 해나간다고 생각하면 가느다란 동지 의식이 피어오른다. 글 서유미 소설가 국립세종도서관 책꽂이 843.6-20-56 북타민 48 예술가의 눈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다 현대적 사랑의 박물관 은 세계적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한 ‘여기 예술가가 있다’라는 퍼포먼스에서 영감을 받은 소설이 다. 사실 모티프만 가져온 게 아니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직접 소설에 등장한다. 헤 더 로즈는 3개월 동안 이어진 마리나의 퍼포먼스에서 틀을 가져온 다음 허구의 인물 을 등장시키려 했지만 마리나로부터 완전한 창작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답변을 받은 뒤 실제 퍼포먼스의 내용에 진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등장시켰다. 실제의 공연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적인 요소와 작가가 만든 허구의 인물들이 사연을 가지고 등장하 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결합한 셈이다. 퍼포먼스의 내용은 간단하다. 오전 9시 30분부터 5시까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의자에 앉아 있고, 관람객들이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예술가의 맞은편에 앉아 서로 를 바라보는 것이다. 예술 행위라지만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 앉아 말도 하지 않고 물 끄러미 바라만 보는 일이 가능할까, 의문이 생기지만 전시 동안 관람객들은 계속 줄 을 서고 마지막에는 미술관 개관과 함께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밤을 새우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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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페이지 내용 : 작가 헤더 로즈는 이 전시를 3주 동안 매일 관람하고, 의자에도 네 번이나 앉으면서 다른 관람객들을 관찰하고 인터뷰하며 소설의 정보를 모았다. 자신이 맞은편에 앉아 6분여 정도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예술가와 마주 앉아 있었던 시간 이 40분이나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놀라게 된다. 사람들은 왜 예술가와 마주 보고 싶어 할까. 맞은편에 앉아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에 휩싸여 있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걸까. 소설 속에는 영화음악 작곡가인 아키 레빈과 퇴직한 미술 교사인 제인, 입양아인 브리티카, 미술 비평가인 힐라야스, 마리나의 매니저인 디터처럼 다양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상실과 고통을 지닌 채 미술관에 오게 된다. 이런 퍼포먼스가 공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온 사람도 있고, 그저 어쩌다 보니 그것을 관람하게 된 사람도 있다.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의 안에 있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채 마리나의 맞은편에 앉게 되고, 마리나의 눈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마주 앉아 말없이 응시하는 시간의 의미 소설의 초반 공연을 지켜보던 두 남녀가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대화를 읽다 보면 우리에게 예술이란 무엇이고, 나는 예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저 사람이 하고 있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게 절망적일 때 우리는 구원하는 건 예술이 아닐 거라고.…… 앉아 있는 건 예술 이 아니야.” 그들의 대화를 들은 퇴직한 미술 교사 제인은 자기 옆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저는 예 술이 늘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를 바라보고 예 술에 대해 감각하고 마리나와 눈맞춤을 한 뒤 자신만의 변화를 겪는다.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때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주 앉아 말없이 눈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퍼포먼스는 새롭게 다가온다. 이제 우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마주 본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VOICEeYe 49 사람들은 왜 예술가와 마주 보고 싶어 할까. 맞은편에 앉아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에 휩싸여 있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걸까.

탐 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