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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페이지 내용 : 오늘, 책 창덕궁, 책과 함께한 역사와 문화 “옛날의 지리와 옛 사람의 향기와 옛날의 문장과 시 위에 지금의 풍경과 지금의 향기와 지금 사람의 느낌이 또 한층 아로새겨지는 일은 얼마나 뜻깊은 일이겠는가. 옛 역사에 되비쳐 제 사는 장소를 사랑하고 제 사는 시간을 성찰하고 제 사는 숨결 노래하는 것이….” 신달자 시인의 새 시집 《북촌》 말미에 적어놓은 장석남 시인의 글이다. 신달자 시인은 2년 남짓 북촌에 산 흔적을 시집에 담담히 담아냈다. 저물어가는 가을이 아쉬운 이들, 지나온 시절이 그리운 이들 모두 창덕궁을 거닐며 읽으면 좋겠다. 북촌 1경으로 꼽히는 창덕궁은 조선의 왕들이 가장 사랑했던 궁궐이다. 정조와 덕혜옹주, 효명세자까지 역사 속 인물들이 유독 사랑했던 이곳, 창덕궁에서 책의 향기에 취해보면 어떨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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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페이지 내용 : 정조는 이들을 데리고 창덕궁 정자 곳곳에서 독서와 낚시를 즐겼다. 정조는 이런 독서로 얼마나 많은 글을 썼을까. 184권에 달하는 《홍재전서弘齋全書》만 봐도 그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정조시대 정치와 문화의 중흥을 상징하는 창덕궁 규장각의 주합루 창덕궁, 책을 사랑한 사람들 개혁의 핵심, 궁궐 도서관 ‘규장각’과 정조 奎章閣 학문 군주 정조에게 규장각 은 궁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조선을 꿈꾸 御製 御筆 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국왕의 어제 와 어필 을 보관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 파를 이겨내고 건국 이래 정치 ·경제 ·사회 등의 현실 문제를 학문적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궁궐 도서관인 규장각은 정조의 ‘씽크탱크’였던 것이다. 당시 최고 권력인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정조 는 규장각에 자신의 정책을 지지할 수 있는 신하를 심으려고 했다. 과감히 서얼을 등용하기 시작한 것. 庶孼許通 그것이 서얼허통 정책이다. 학식과 능력에 관계없이 출세의 길이 막혔던 서얼들에게 정조가 물꼬 를 터 준 것이다. 이들은 ‘규장각 사검서’로 불리며 정조를 보좌한다. 당시 지식계를 단숨에 평정한 그들 實事求是 은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다. 이들은 실사구시 학풍으로 조선의 실학을 만들고 발전시킨 인물들이다. 규장각을 통한 인재 등용법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정조의 어록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인재에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근래 관료의 임용이 모두 서울에서만 나오고 먼 지방 사람은 백에 하나도 거론되지 않는다. 이 어찌 차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이겠는가? 열 집이 사는 고 을에도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 멀고 외딴 시골 선비들이 재주를 품은 채 헛되이 늙어가는 처지를 탄식하지 않겠는가?” 당시에도 관리들은 서울 출신이 많았다. 정조는 이런 폐단을 막고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 이렇게 뽑은 인재들을 정조 스스로 교육했다. 이들을 초계문신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데리고 창덕궁 정자 곳곳에서 弘齋全書 독서와 낚시를 즐겼다. 정조는 이런 독서로 얼마나 많은 글을 썼을까. 권에 달하는 《홍재전서 》 184 만 봐도 그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부용지에 앉아 있노라면 정조와 규장각 관리들이 함께 책 읽고 토론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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