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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페이지 내용 : 요즘 아이들의 여름방학 풍경은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맛집 탐방과 워터파크 방문이 대세가 됐고, 들판에서의 곤충 채집은 박물관의 곤충 기획전 방문으로 대체됐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100원짜리 ‘쭈쭈바’를 잔뜩 쌓아 놓고 팔 기 시작하는 7월로 접어들면, 아이들의 얼굴이 여름 해처럼 갈 수록 밝아졌다. 고대하던 여름방학이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방학 하루 이틀 전 아이들에게 커다란 동그라미가 그려진 종이를 하나씩 나눠 줬 다. 동그라미 위에 적힌 ‘생활계획표’라는 다섯 글자에 마치 내 일이 소풍 떠나는 날인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 여름방학 동안 하루를 어떻게 보낼 건지 계획을 세워 보자!” 밤 10시부 터 아침 7시까지를 ‘꿈나라’로 채우고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을 각각 한 시간씩 잡아 놓는 것은 그 시절 생활계획표의 공식. 곳 곳에 ‘휴식’과 ‘자유시간’을 적되 ‘공부’, ‘책 읽기’, ‘교육방송 시 청’ 같은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을 채우는 일도 게을리하 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마냥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방학식이 끝 나자마자 배부되는 생활통지표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 이들의 학업 성취도를 말로 풀어서 설명하거나 ‘잘함’ 혹은 ‘보통’ 정도로 표시하지만, 예전에는 시험 성적에 따라 각 과목에 ‘수·우·미·양·가’가 매겨졌다. 수와 우가 많은 아이들에게는 칭찬이 우수수 떨어졌지만,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양갓집 자식’이라는 친구들의 한여름에 펼쳐진 40일간의 ‘여름방학 대서사시’ 글. 강진우 문화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서성호 그땐 그랬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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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이지 내용 : 놀림과 함께 아빠, 엄마의 호된 꾸지람이 떨어졌다. 되 도록 늦게 혼나고 싶어 이번에는 생활통지표가 우편으 로 온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대다가 되려 더 야단맞았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서로 성적은 달랐지만, 여름방학이 선사하는 기쁨과 여유만큼 은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많은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에 놀러 가서 23주 동안 내리 놀다가 왔다. 따 가운 햇살을 뚫고 산과 들, 바다를 누비고 다니며 곤충 채집과 물놀이를 하다 보면 하루 해가 금방 저물었다. 때때로 어둠을 틈타 수박, 참외 등을 서리해 먹기도 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사촌처럼 가까이 지내서 설령 들키더라도 한두 시간 손들고 벌을 서고 나면 도리어 잘 익은 과일을 한두 개 받고 돌아올 수 있었던 인심 넘치는 시절이었다. 그렇게 열흘을 넘기면 피 부가 논바닥의 진흙처럼 새까매졌고, 온몸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졌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정신없이 놀다 보면 어느 새 개학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제야 방학 숙제 가 걱정되기 시작한 아이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림 그리기, 곤충 관찰하기, 가족 신문 만들기, 우리 고장의 명소 방문하기, 여름방학 탐구생활 같은 방학숙제를 번 갯불에 콩 볶아 먹듯 사나흘 만에 해치웠다. 그 무렵이 면 “엄마, 이날 날씨가 어땠죠?” 하는 소리가 집집마다 끊이지 않았고, 모두가 ‘앞으로는 하루에 하나씩 숙제 를 끝내야지’ 하는 결심을 굳게 세웠다. 물론 다음 방학 이 되면 속절없이 사라져 버릴 신기루 같은 다짐이었 지만, 그 순간만큼은 꽤나 진지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아이들의 여름방학 풍경은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없을 정 도로 달라졌다. 맛집 탐방과 워터파크 방문이 대세가 됐고, 들 판에서의 곤충 채집은 박물관의 곤충 기획전 방문으로 대체됐 다. 한편에서는 미흡했던 과목의 성적을 올리느라 여념이 없 고, 몇 주 동안 영어 캠프를 다녀오는 아이들도 꽤 많다. 하지 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방학 때 있었던 일 들을 주제로 수다를 떠는 생기로운 모습만큼은 그때나 지금이 나 변함이 없다. 그만큼 여름방학은 친구와 나누고 싶은 추억 을 쌓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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