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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페이지 내용 : 정세랑 저 | 문학동네 펴냄 | 2020 시선으로부터 뻗어나가는 목소리 시선으로부터 우리에게도 멋진 어른의 얘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동안 봐왔던 한국 소설 속 노인들은 멋과는 거리가 멀었다. 각자 사연이 있지만 가족들과 공유하지 않고, 자기 세계에 갇혀 고집을 부리거나 삶에서 중요한 것을 잃은 채 불행 속에 서 있는 모습이 많았다. 과거의 빛이든 그늘이든 젊은 사람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덤덤하게 나누는 어른의 얘기를 읽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시선으로부터 는 그런 갈증을 해소해주기에 충분했다. 글 서유미 소설가 국립세종도서관 책꽂이 813.7-20-320 북타민 48 굴곡진 인생 속에서도 ‘꼰대’가 되지 않은 멋진 어른 정세랑 작가의 소설 시선으로부터 에는 삶을 치열하게 살면서도 주변을 세심하게 돌 아보고, 나쁜 일은 즐겁게 헤치고 나가는 ‘심시선’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20세기의 여자인데도 할 말은 기어이 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심시선은 통쾌하다. 또한 제사는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고 말하고, 아들만 찾던 어른 세대의 모습 과 달리 자식들을 개별적으로 애정한다는 면에서 시선으로부터 는 지금의 우리에게 반갑게 도착한 멋진 어른의 이야기다. 소설은 화가이자 작가인 심시선이 생전에 발표한 글과 말로 시작해, 그녀로부터 뻗어나 온 가족 구성원들의 사연을 지난다. 사연의 주인공과 심시선의 대화와 연결점을 통해 그 안에 살아 있는 심시선이라는 인물과 엄마인 시선, 할머니인 시선과 구별되는 현재 의 인물을 새롭게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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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페이지 내용 : voiceeye 49 소설의 문장은 유쾌하고 따스하지만 심시선과 그 가족들이 겪으며 지나가는 삶의 여정 은 녹록지 않다. 심시선은 전쟁 중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이고, 그녀의 삶 은 가스라이팅Gaslighting과 정신적 학대, 예술계의 갑질로 얼룩져 있다. 자녀와 손녀들도 대기업의 횡포와 염산 테러, 메신저에 의한 성폭력, 커리어와 관계에 대한 고민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심시선의 삶에는 여러 종류의 폭력이 존재했고, 폭력으로 인생의 많은 순간이 바뀌었 다. 그때마다 그녀는 어느 쪽으로 갈지 스스로 선택했고, 살아남았다. 그러면서도 주변 의 상황이나 색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색을 지켜내는 삶을 산다.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왜 심시선이라는 인물에 매료될까. 우리 주변에 심시선처럼 인생 의 역경을 딛고 살아남아 성공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늙어 가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굴곡진 인생을 나름대로 멋지게 헤쳐 나온 어른 들은 대체로 권위적이고 보수적이고 고집 센 ‘꼰대’가 되어 자신보다 젊은 사람들을 수 직적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그러니 손녀와도 옆에 앉아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어떤 문 제에 대해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는 심시선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멋진 어른으로 나이가 든다는 것 가족들은 심시선의 10주기 기일을 앞두고 하와이라는 이국적인 공간에 모인다. 저마다 의 방식으로 자신의 시작인 심시선을 기억하고,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과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것은 시선으로부터 시작되고 뻗어 나온 나무와 숲을 두루 바라보는 일이 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해가는 일이다. 주인공인 심시선의 인생뿐 아니라 각각 이름을 부여받은 딸과 아들, 며느리, 손자ㆍ손 녀, 각 사람들의 사연도 흥미롭다. 미술품 복원가, 된장잠자리를 좋아하는 곤충학자, 괴물 전문 디자이너, 디제잉을 좋아하며 호기심이 많고 친화력이 좋은 예술가 등등. 하와이에 모인 가족들은 일상에서 뚝 떨어진 자연의 공간에서 각자, 또 같이 자신들의 할머니이자 엄마인 심시선을 애도하는 시간을 보낸다.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동안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도, 자신의 삶에도 심시선 같은 어른이 있었는지 둘러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심시선 같은 어른으로 나이 들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왜 나에게는 심시선 같은 어른이 없었나 한탄하기보다 ‘그런 어 른으로 나이 들어가자’라고 다짐하게 된다면 이 소설은 충분히 의미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에 나오는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 의 사랑이다”라는 문장은 이 소설을 멋지게 관통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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