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글을 시작하며:도유호를 읽으면 북한 고고학이 보인다
감사의 글
1부 청년 학도 도유호
함흥 출생의 독학篤學 청년
도정호都定浩와 도유호都宥浩
도유호의 가계家系와 함흥영생학교 시절
휘문고등보통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
유럽 유학의 길에 오르다
경성京城에서 프랑크푸르트佛郞府로
독일 유학 생활
그늘 밑에 한 송이 장미꽃!
민족 문제 그리고 춘원 이광수
그러나 아직 나로서는 춘원이 너무나 가깝습니다
박사학위 논문 통과
프랑크푸르트대학佛郞府大學에서 비엔나대학維也納大學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951.9-D631p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문화권설과 비엔나학파
비엔나학파와 문화사 고고학
도유호와 비엔나학파
2부 귀국과 해방 공간
만록총중일점홍滿綠叢中一點紅
비엔나維也納에서 경성京城으로
도유호의 귀국 소식
비엔나 그리웁다! 하담荷潭 도유호
제비 제비 날아간다
국내 학자들과의 갈등, 그리고 잃어버린 행동의 자유
비엔나에서 귀국 이후의 학문 활동
도유호의 변증법적 발전사관
일본으로 출국, 그리고 귀국
해방 공간의 정치적 격동기:민주주의민족전선, 인민당, 남조선공산당
제3의 길을 찾아서
정치 활동과 인민당 프락치
3부 도유호와 북한 고고학(1):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
북으로 간 도유호
1946년 10월 20일, 김일성대학 교원으로 채용 결정
고고학 강좌장:도유호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의 발족과 도유호
『문화유물』 간행과 북한 학계의 동향
한국전쟁 이전의 유적 조사와 발굴
한흥수에 대하여
유럽 유학 이전:유물사관 그리고 조선적 특수성론
프라이부르크대학(스위스)에서 박사학위를 받다
해방 공간과 입북
도유호와 한흥수의 학술 논쟁
한흥수의 논문, 논쟁의 빌미가 되다
도유호의 반론:변증법적 발전사관, 문화권설, 유물사관
논쟁의 핵심 줄거리
한흥수의 재반론:민속학 연구의 당파성 문제
논쟁 이후의 한흥수
한국전쟁과 도유호
통역 장교, 인민군 소좌 도유호
전쟁으로 훼손된 고고학 자료
4부 도유호와 북한 고고학(2):1950년대 중반~1960년대 중반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장, 도유호
회령 오동 유적 발굴 참가
조선의 원시시대도 전 세계사적 범위에서 연구하여야 한다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설립(1956년 3월 2일)
원시 유적과 유물의 연구
나선 초도 유적(1949년 발굴)
온천 궁산 유적(1950년 발굴)
봉산 지탑리 유적(1957년 발굴)
회령 오동 유적(1954~55년 발굴)
이제 조선 고고학은 새로운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조선 거석문화에 대하여
고고학 유적, 유물에 관한 새로운 용어 정리
『조선 원시 고고학』 간행
도유호 동지에게 국가박사학위 수여(1961년 4월)
장덕리 털코끼리 유적의 발굴:고고학, 지질학, 고생물학의 합작
강좌:빙하기, 인류의 기원, 구석기란 무엇인가
굴포리 구석기유적과 도유호: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토론과 논쟁의 시대
삼국 시대의 사회 경제 구조에 대한 문제
고조선 문제
초기 금속문화의 기원 문제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기원 문제
운명의 갈림길
1962년 이전의 상황
1963년 이후의 변화
글을 마무리하며:도유호는 떠났지만 그의 학문은 우리와 함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