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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 도유호 : 한국 고고학 첫 세대 / 한창균 지음
표지이미지
표제/책임표시사항
하담 도유호 : 한국 고고학 첫 세대 / 한창균 지음
발행사항
서울 : 혜안, 2017
형태사항
508 p. :삽화, 초상 ;24 cm
주기사항
한자표제:荷潭 都宥浩
권말부록: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에 관한 결정서 등
참고문헌(p. 453-482)과 색인수록
표준번호/부호
ISBN: 9788984945753  93910 : \32000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911.0025  듀이십진분류법-> 951.9  
주제명
도유호,  都宥浩,  1905-1982  KAC201716637  고고학[考古學]  고고학자[考古學者]  전기(인물)[傳記]  

권별정보

자료위치출력
권별정보 안내
신청 편/권차 편제 저작자 발행년도 등록번호 청구기호 자료이용하는곳 자료상태 예약자 반납예정일 매체구분 바구니
한창균 지음 2017 SE0000303303 911.0025-17-1 일반자료실1(세종1층) 자료실내 비치 0 - 인쇄자료(책자형) 
한창균 지음 2017 SE0000303304 911.0025-17-1=2 일반자료실1(세종1층) 자료실내 비치 0 - 인쇄자료(책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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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글을 시작하며:도유호를 읽으면 북한 고고학이 보인다
감사의 글

1부 청년 학도 도유호

함흥 출생의 독학篤學 청년
도정호都定浩와 도유호都宥浩
도유호의 가계家系와 함흥영생학교 시절
휘문고등보통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
유럽 유학의 길에 오르다
경성京城에서 프랑크푸르트佛郞府로
독일 유학 생활
그늘 밑에 한 송이 장미꽃!
민족 문제 그리고 춘원 이광수
그러나 아직 나로서는 춘원이 너무나 가깝습니다
박사학위 논문 통과
프랑크푸르트대학佛郞府大學에서 비엔나대학維也納大學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951.9-D631p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문화권설과 비엔나학파
비엔나학파와 문화사 고고학
도유호와 비엔나학파

2부 귀국과 해방 공간

만록총중일점홍滿綠叢中一點紅
비엔나維也納에서 경성京城으로
도유호의 귀국 소식
비엔나 그리웁다! 하담荷潭 도유호
제비 제비 날아간다
국내 학자들과의 갈등, 그리고 잃어버린 행동의 자유
비엔나에서 귀국 이후의 학문 활동
도유호의 변증법적 발전사관
일본으로 출국, 그리고 귀국
해방 공간의 정치적 격동기:민주주의민족전선, 인민당, 남조선공산당
제3의 길을 찾아서
정치 활동과 인민당 프락치

3부 도유호와 북한 고고학(1):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

북으로 간 도유호
1946년 10월 20일, 김일성대학 교원으로 채용 결정
고고학 강좌장:도유호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의 발족과 도유호
『문화유물』 간행과 북한 학계의 동향
한국전쟁 이전의 유적 조사와 발굴
한흥수에 대하여
유럽 유학 이전:유물사관 그리고 조선적 특수성론
프라이부르크대학(스위스)에서 박사학위를 받다
해방 공간과 입북
도유호와 한흥수의 학술 논쟁
한흥수의 논문, 논쟁의 빌미가 되다
도유호의 반론:변증법적 발전사관, 문화권설, 유물사관
논쟁의 핵심 줄거리
한흥수의 재반론:민속학 연구의 당파성 문제
논쟁 이후의 한흥수
한국전쟁과 도유호
통역 장교, 인민군 소좌 도유호
전쟁으로 훼손된 고고학 자료

4부 도유호와 북한 고고학(2):1950년대 중반~1960년대 중반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장, 도유호
회령 오동 유적 발굴 참가
조선의 원시시대도 전 세계사적 범위에서 연구하여야 한다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설립(1956년 3월 2일)
원시 유적과 유물의 연구
나선 초도 유적(1949년 발굴)
온천 궁산 유적(1950년 발굴)
봉산 지탑리 유적(1957년 발굴)
회령 오동 유적(1954~55년 발굴)
이제 조선 고고학은 새로운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조선 거석문화에 대하여
고고학 유적, 유물에 관한 새로운 용어 정리
『조선 원시 고고학』 간행
도유호 동지에게 국가박사학위 수여(1961년 4월)
장덕리 털코끼리 유적의 발굴:고고학, 지질학, 고생물학의 합작
강좌:빙하기, 인류의 기원, 구석기란 무엇인가
굴포리 구석기유적과 도유호: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토론과 논쟁의 시대
삼국 시대의 사회 경제 구조에 대한 문제
고조선 문제
초기 금속문화의 기원 문제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기원 문제
운명의 갈림길
1962년 이전의 상황
1963년 이후의 변화

글을 마무리하며:도유호는 떠났지만 그의 학문은 우리와 함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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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고고학 첫 세대이자, 잊혀진 학자 도유호의 삶을 복원하다!
    이 책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굴포리 구석기유적을 발굴하고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였지만, 북으로 간 것 때문에 잊혀진 고고학자 하담(荷潭) 도유호(1905~1882?)의 삶과 학문을 평전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도유호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유럽 유학, 해방 공간, 월북과 같이 복잡한 시대적 여건을 두루 겪은 지식인이다. 그는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고고학 개론서인 <조선 원시 고고학>을 저술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 고고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함흥영생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다음 중국 북경의 연경대학을 중퇴하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을 거쳐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유호가 독일로 유학을 떠났던 가장 큰 동기는 일제강점기라는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 있는 민족 문제와 관계있다. 유럽 유학 중 그는 민족 문제에 대한 자신의 뜻을 서신에 담아 김명식, 주요한, 이광수 등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프랑크푸르트대학 재학 당시 독일은 나치스 정권이 세력을 확장하는 험난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으로 학적을 옮겨, 유럽에서 한국사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학위논문에서 그는 통사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문화적 맥락 속에서 한국사의 전개 과정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도유호는 귀국을 서둘지 않았다. 박사학위논문을 통하여 한국사 전반에 대한 인식의 체계를 세웠으나, 자신의 학문 세계를 넓히고자 선사학과 민속학 분야에 또 다른 주의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인 꿈을 실천하려는 목표로 비엔나에 머물며 비엔나학파에서 추구하였던 문화사적 방법론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갖추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유럽 유학생활을 접고, 1940년 초에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유학 당시 도유호는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았으며, 귀국 이후에는 자신의 학문적 꿈을 이루어내는데 어울리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일본에 체류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고향 함흥에 잠시 머물렀던 도유호는 1946년 3월 서울로 와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선과학자동맹, 인민당, 조선공산당에 적을 두며 정치적 활동에 적극 개입하였다. 비록 철저하게 무장된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이 같은 정치적 이력은 그가 김일성대학 교원으로 임용되는데 요긴한 것이었다. 1946년 10월 16일 삼팔선을 넘어 월북한 도유호는 곧 김일성대학 교원으로 채용되는 기회를 얻었다.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1947년 10월 역사문학부 ‘고고학 강좌장’으로 임명되었다. 북녘에서 그의 고고학 관련 활동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와 ‘조선력사편찬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공산군 측의 통역장교로 근무하였고, 과학원 산하의 물질문화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후보원사’로 임명되었다.
    월북 이후(특히 정전협정 이후), 그는 북한 고고학을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6년에 궁산 유적의 발굴보고서를 내면서, 해방 이후 처음으로 신석기시대의 편년 체계를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1957년 발굴된 지탑리 유적의 조사 및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는 당시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렀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상호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찾아냈다. 그 뒤 거석문화 연구, 철기시대 유적의 연구 등을 통하여 그는 일제 어용학자들이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의 일환으로 활용하였던 이른바 ‘금석병용기설’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도유호는 1963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굴포리 구석기유적의 존재를 최초로 확인한 주인공이 되어 북한 고고학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기껏해야 7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북한 고고학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선사시대 편년의 기본 얼개를 마련하였다. 여기에서 도유호의 학문적 역량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이와 같은 학문적 공로를 인정받으며 그는 국가박사로 임명되었고, 과학원 원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으로 잠깐 동안 누릴 수 있었던 짧은 영광에 지나지 않았다.
    도유호는 고조선의 사회경제 구조와 관련하여 김석형으로 대표되는 역사학계와 깊은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다. 당시 고대사 분야의 주요 연구동향은 고조선 사회를 노예소유자국가로 인정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도유호는 끝내 여기에 동참하지 않으며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였다. 학문적인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그는 유물사관의 내재적 발전론에 기초하여 한국 고대사의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던 시대적 여건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다. 특히 1960년대 중반 이후 김일성 개인숭배의 전면적 확립과 유일사상 체계의 구현이라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도유호가 줄기차게 내세웠던 문화이동론은 ‘부르주아적, 수정주의적인 반동 학설’로 낙인이 찍혔다. 북한 원시 고고학의 체계를 세우는데 이바지한 바가 누구보다도 컸지만, 그는 당시 사회에 회오리친 정치적, 사상적 투쟁에 휘감기며 북한 고고학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비엔나학파의 문화사적 방법론에 큰 영향을 받았던 도유호의 전파론적 인식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적지 않은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철저하게 전파론적인 시각에서 한국 원시문화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을 해명하려 했던 그의 연구 성향은 외적 문화의 요인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불모지와 다름없는 고고학적 여건에서 한국 원시문화의 체계를 확립하는데 공을 들였던 그의 학술적인 노력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적의 발굴과 연구, 원시문화의 전개 과정에 대한 이론적 설명, 고고학적 문화의 개념 창안(굴포문화, 궁산문화), 지금도 유효하게 활용되고 있는 그의 논문과 저서, 자연과학 분야와의 합작을 통한 공동 연구, 순화된 고고학 용어의 사용 등등이 그것이다.
    이 책의 저자 한창균 연세대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개설서인 도유호의 <조선 원시 고고학>이 남쪽에서 완전히 잊혀지는 현실이 안타까워, 1994년 그 복간본을 내는 데 관여하면서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이자 선학으로서 도유호의 삶과 학문을 자리매김하고자 결심하고, 국내외에서 관계된 모든 자료를 섭렵하며 10년 가까운 세월을 이 책에 투자했다. 저자가 본 도유호의 역사적 자리는 “해방 이후 이루어진 한국 고고학사의 흐름 속에서 도유호가 쌓은 학문적 업적을 되짚어볼 때, 그는 한국 고고학의 첫 세대로서 어느 누구도 비견될 수 없을 만큼 진정 ‘최고봉’에게 어울리는 역할을 다하였다.”는 결론으로 매김된다.

* 해당게시물을 오류게시물로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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